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MBC 창작동요제 (문단 편집) === 행사 관련 === --어째 사건/사고나 논란 거리가 많다.-- * 1983년(제1회) 대회는 어린이날 전날도 아닌 어린이날 전 토요일인 4월 30일에 했다. [* 1992년 제10회 MBC 창작동요제를 기념해서 동요제 한 시간 전에 김창완과 황선숙이 진행하는 라디오 특별방송을 했는데, 이 방송을 진행한 김창완이 증언하기를 ] 당시에 너무 홍보가 안 되어서 객석이 텅텅 비었고, 리틀앤젤스 예술회관 앞에서 "창작동요제 하니까 들어와서 구경하세요."라는 식으로 홍보했다고 한다. * 1983년(제1회) 대회의 사회자인 차인태와 홍광은은 같은 MBC 라디오국이 개최한 1983년 [[강변가요제]]에서도 사회를 봤는데, 당시의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XWi7sQcizI|경연 때 이름없는 새를 부른 손현희]], [[https://www.youtube.com/watch?v=E2RIZLUrdOM&list=RDE2RIZLUrdOM&start_radio=1|대상 받고 이름없는 새를 다시 부른 손현희]] ]을 보면 강변가요제가 창작동요제보다 허접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84년(제2회) 대회는 공식명칭 앞에 '''84MBC어린이특별기획'''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한국 최초의 동요'''라는 [[반달(동요)|반달]]이 탄생(1924년)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 거기다가 이 때에는 반달 노래를 만든 [[윤극영]]도 살아있었다. 윤극영과 반달을 기념하는 각종 기념행사의 하나로서 전년도에 시작한 MBC 창작동요제를 크게 확대[* 녹화방송에서 생방송으로, TV 단독 방송에서 TV, 라디오(AM), FM 동시 방송으로. 반주와 특별공연을 외주(ㅇㅇㅇ 실내악단과 리틀앤젤스 합창단)에서 MBC 관현악단과 어린이합창단으로. 거기다가 사전 제작한 출연자 영상도 추가. ]해서 개최한 것. 이 때 확대개편한 것이 이후 MBC창작동요제 행사 운영의 기준이 된다. 1989년에 윤극영이 세상을 떠나고, 반달 70주년인 1994년(제12회) 대회에는 윤극영과 반달은 언급도 없다가, 2004년(제22회) 대회 때 특별공연을 한국동요 80주년 기념 행사로 치렀지만 이 때는 이미 MBC가 창작동요제에 돈을 안 쓰던 때이고 80주년이 무색하게 행사 자체를 너무 허접하게 운영했다. * MBC 라디오국이 주관하고 텔레비전제작국이 진행하는 MBC창작동요제에는 라디오국장과 텔레비전제작국장이 나란히 심사위원으로 배석했다. [[강변가요제]]는 라디오국장만, [[대학가요제]]에는 텔레비전제작국장만 배석했던 걸 생각하면 MBC 안에서 창작동요제가 가지는 위상을 알 수 있다. 1994년 제12회 대회에는 사장 바로 아래 직위인 편성이사가 심사위원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편성이사는 제1회 대회 사회자이기도 했던 [[차인태]]. ] * 1회와 2회 대회는 리틀앤젤스 예술회관, 3회부터 18회까지는 호암아트홀에서 개최하였다. 호암아트홀이 더이상 방송 행사에 대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19회는 리틀앤젤스 예술회관, 20회는 강원도민회관, 21회는 건대 아트홀 등으로 행사 장소가 계속 바뀌게 된다. * [[어린이날]]에 생방송으로, 품격을 갖춘 공간에서 진행하는 '''창작동요제'''의 시간과 공간의 상징성은 매우 크기 마련인데, 어린이날도 아니고, 리틀앤젤스 예술회관이나 호암아트홀 같은 품격있는 연주 공간도 아니고, 생방송도 아닌 창작동요제가 되면서 관심도와 인기가 확 식어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 5월 3일에 강원도에서 열린 2002년(제20회) 대회[* 그나마 5월 3일에 행사한 걸 녹화해서 어린이날에 방송했다면 모를까, 5월 3일에 생방송으로 송출했다. 매년 5월 5일에 하던 행사를 5월 3일에 방송하면 사전에 관심을 갖고 정보를 찾는 사람만 알고 볼 수 있다. 평소에 관심이 없다가 "어린이날이 되었으니까 창작동요제를 볼까?"라는 생각으로 신문의 편성표를 뒤적거리던 사람은 "올해는 창작동요제를 안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신문을 덮어버리게 되는 것. ], 녹음 반주를 쓴 2005년(제23회) 대회와 금강산에서 진행한 걸 녹화해서 어린이날에 방송한 2006년(제24회) 대회, 역시나 녹화해서 방송한 2009년(제27회) 대회가 그 예. * 마찬가지로 관현악 반주도 창작동요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서 전자악기와 미디음악이 동요에 도입되는 것을 늦추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전자악기와 드럼을 제3회 대회에 처음으로 도입했다가, 4회 대회부터는 다시 1, 2회 대회처럼 현악기와 목관악기, 피아노 만의 반주로 돌아갔다. 11회에 가서야 금관악기와 전자악기가 도입되었고, 12회 대회에서 비로소 드럼도 도입되었다. * 1987년(제5회) 대회까지는 초등학교 교사만 참가할 수 있었다가 1988년(제6회) 대회부터 초등학교 외에 중고교 교사까지로 참가범위가 넓어졌다. * 1992년(제10회) 대회 때 축하공연에 초대된 [[유열(가수)|유열]], [[임백천]], [[노사연]]은 제11회(1993년) 대회 때 다시 초대되었다. * 1991년(11회) 대회 때 '농악'이라는 발표곡이 악보에 '''사물놀이 16마디'''라도 쓰여있는 통에 그 한 곡만을 위해 사물놀이패가 반주를 한 적이 있다. MBC 창작동요제 반주에 국악기가 쓰인 건 이 때가 유일하다. * 1992년 3월 14일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방송에 데뷔[* 결성은 1991년 9월, 앨범 발매는 3월 23일 ]했는데, 그 해 5월 5일에 개최한 제10회 MBC 창작동요제의 특별공연에 '''사랑의 랩송'''이라는 노래가 등장했다. 당시에 공연하던 MBC어린이합창단 단원들이 [[랩(음악)|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구사하였으니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준비했을 것이다. 대회는 MBC 라디오국에서 주관하지만 방송은 MBC 본사가 총동원되어서 몇 달 동안 준비하고 제작하는 걸 생각하면, 당시의 MBC가 얼마나 혁신적이었나를 짐작할 수 있다. * 1994년(제12회) 대회는 참가자격이 초중고 교사로 제한되었음에도 주최측의 실수로 일반인 참가자가 작곡한 노래가 본선에 올랐다가 뒤늦게 출전을 취소하는 바람에 평소보다 한 팀이 빠진 14팀으로만 결선이 치러졌다. 이를 계기로 13회 대회부터는 작곡자의 참가자격이 완전 폐지되었다. --그래도 본선 출전을 못했던 어린이는 같은 노래교실에서 출전한 다른 팀에 참여하여 본선무대에 올랐고, 참가자격 제한이 폐지된 이듬해 대회에 역시 일반인 작곡자가 만든 '''예쁜 아기곰'''을 불러 복수에 성공했다.-- * 1995년을 마지막으로 MBC어린이합창단이 해체되면서 당시 합창단 지도자였던 이민숙이 단원이었던 어린이들을 모아서 '''노래친구들'''이라는 어린이 노래그룹을 만들었다. 1996년(14회 대회)부터는 노래친구들이 MBC 창작동요제의 공연을 담당하게 되었다.--외주화-- 하지만, 몇 십 명이나 되는 합창단원이 몇 달 동안 준비하는 공연[* 거기다가 성인합창단이나 전속 개그맨, 인형극단 등도 참여했고, MBC 의상실에서 직접 제작한 무대의상은 말할 것도 없고 대형 방송사가 주관하는 만큼 특별공연에 섭외되는 연예인의 수준도 장난 아니었다. 1985년 제3회 MBC창작동요제에는 [[조용필]](!!)과 [[이선희]]를 섭외했을 정도였으니. 무엇보다도 이 시절에는 공연에 쓸 음악을 직접 만들었다. ]과 10여 명에 불과한 노래그룹이 짧은 시간에 준비하는 공연은 당연히 비교불가였고, 이 때를 기점으로 창작동요제의 공연 수준이 확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나마 14회 대회는 MBC어린이합창단만 노래친구들로 바뀌었을 뿐 성인합창단, 전속 개그맨, 인형극단이 참여하는 공연의 수준은 유지했는데, 15회 대회부터는 공연 출연자가 노래친구들 밖에 없었다. ] * 1997년(15회) 대회에서 창작동요제 역사상 최악의 방송사고가 나왔다. 가창자들의 경연 뒤 진행된 축하공연에서 마이크가 꺼져있었던 것. 생방송 중에 마이크가 꺼져서 교체한 것 자체는 1996년(14회)[* 출연자를 인터뷰하던 개그맨 [[서승만]]의 마이크가 꺼져서 사회자인 [[신동엽]]이 마이크를 바꿔줬다. ]와 2005년(23회)[* 사회자인 [[정려원]]의 마이크가 꺼져서 스탭이 마이크를 바꿔줬다. ]에도 있었지만, 마이크가 꺼진 상태로 말을 하는 동안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작게 나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1997년에는 공연자[* [[북한이탈주민]] 어린이였다. ]가 마이크가 꺼진 상태로 노래부르는 중에 스탭들이 당황해서 주고받는 말[* "마이크 꺼졌어." "빨리 마이크 새로 갖다 줘."와 같은 말 ]이 방송으로 그대로 나가면서 노래소리를 덮어버린 것. 결국 노래 한 곡이 다 끝날 때가 되어서야 사회자인 [[이문세]]가 자기 마이크를 대줬고, 공연자는 끝난 뒤에 다시 노래를 불렀다. 참고로 이 때의 반주자는 [[산울림]]이었다. * 위의 1997년(15회) 대회에서 축하공연한 것이 TV에서 볼 수 있는 [[산울림]]의 마지막 완전체 공연이었다. * 2000년(18회)에는 당시 방영하고 있었던 사극 [[허준(드라마)|허준]]과 시트콤 [[세 친구]]의 출연진들의 축하 영상이 나왔었다. * 2001년(제19회) 대회 때 '''교과서에 실린 창작동요 특집''' 공연에서 역대 출연자들이 등장했다. 즐거운 소풍길(3회 대상 안아원), 봄(8회 대상 전혜윤), 하늘나라 동화(9회 대상 국은선), 화가(10회 은상 안선희), 노을(2회 대상 권진숙), 새싹들이다(1회 대상 이수지)의 가창자가 등장하여 이듬해 열릴 20회 대회를 기대하게 했으나, 20회 대회에는 네 명만 초대되었다. * 20주년 기념으로 열린 2002년(제20회) 대회에서는 과거 대상 수상자인 1회 대회의 이수지(12회에도 특별출연했었다.), 7회 대회의 한지웅, 8회 대회의 전혜윤, 9회 대회의 국은선이 성장하여 성인이 된 모습으로 특별출연했고, 이들은 당시 수상했던 곡을 그대로 불러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아냈다. * 2003년(21회) 대회에는 '종진이의 일기' 코너에 과거 14회 대회의 대상 수상자인 박종진의 대학생활 등의 일상이 소개되었다. * 2007년(제25회) 대회는 진행으로 욕을 참 많이 먹었다. 창작동요제 25회를 기념한다며 장소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으로 잡고 '''1000인의 합창단'''을 기획했는데, 합창단을 섭외한 것도 아니고 합창단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집했다. MBC는 어린이와 성인 합창단을 포함해 다양한 합창단이 많이 응모할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실제로 응모한 사람들은 각종 노래교실에서 조직한 어린이 중창단 + 극소수의 팬 등 어차피 1000인의 합창단이 아니어도 창작동요제를 보러 갈 사람 밖에 없었다. 이에 어떻게든 1000인을 채우기 위해 참가자의 가족과 지인들까지 1000인의 합창단에 포함시켰고, 초대손님으로 예우해야 할 역대 참가자들까지 합창단석에 앉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해가면서 합창단을 채우니 일반 객석에 앉을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에 MBC가 생각해낸 것이 아이돌 그룹([[동방신기]]와 [[SUPER JUNIOR]])을 섭외하고 이들이 축하무대에 선다고 홍보해서 객석을 이들의 팬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결국 예상대로 일반 객석 대부분이 아이돌 그룹의 팬[* '''내가 하다하다 이제는 창작동요제까지 보러 가야 하나?'''라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으로 채워졌으나, [* 행사를 며칠 앞두고 동방신기의 교통사고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에 동방신기의 출연 여부를 묻는 팬이 많았지만, 주최 측에서 확실히 알려주지 않아서 이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행사장을 찾았던 팬들은 ] 결국 가수들이 오지 않자 전부 나가버려 관객석이 텅텅 비게 된다(...) 무턱대고 큰 공연장을 섭외한 데다가 1000인의 합창단처럼 외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썼으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동요제 참가팀은 역대 최소인 9팀 밖에 되지 않았고, 행사 중에는 참가자 홀대 논란까지 일었다.[* MBC창작동요제가 25회를 맞은 것을 기념해 초한 역대 참가자들은 25회까지 MBC창작동요제의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이니, 절대로 홀대받을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MBC가 역대 참가자들을 초대해놓고 홀대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 2004년 제22회 대회 때에도 한국동요 80주년([[반달]] 항목 참조) 기념이라고 역대 참가자들을 초대해놓고는 홀대했던 것. MBC는 '''그 때 누구를 초대했는지 명단도 파악하지 않았다.''' 불과 3년만에 같은 행태를 반복한 것이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